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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지극히도 사실적인 동시대의 사랑법

 

책을 읽기 전에 잠시 마음의 준비를 했다. 먼저 읽은 지인이 소설 내용이 다소 파격적이라는 후기를 전했기 때문이다. 파격적인 이유는 주인공이 동성애자라서는 당연히 아니고 그의 삶의 방식이 내 삶과 너무 거리가 멀어서다. 그런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재미있고 술술 읽힌다.

 

김하나 수필가의 추천사가 나의 마음을 잘 대변해준다.

 

당신은 ... 그에 따르는 '경박함'에 혀를 찰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결코 할 수 없을 한가지는 이 이야기들을 읽다 마는 것이다. 그저 너무 재미있어서, 또는 '이것들이 어찌 되나 보자'하는 마음으로 읽어나가다 보면 아, 마지막에는 속수무책으로 눈물을 흘리게 된다.

 

나도 딱 저 마음, '이것들이 어찌 되나 보자'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연작 소설이다. 총 4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졌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인공 영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랑이라고 해서 꼭 연인 간의 사랑만 다루는 것은 아니고 우정과 모성애 등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등장한다. 물론 주가 되는 건 연인 간의 사랑이다.

 

흡인력 있는 이야기는 물론이고 구조적으로도 잘 짜인 소설이다. 읽으면서 어렴풋하게 느낀 생각과 감정이 강지희 평론가의 해설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래서 꼭 해설을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재희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명명되는 시절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재희는, 이제 이곳에 없다.(68)

 

'내 유년 시절이 끝나다니 믿을 수 없어.' 영화 '작은 아씨들'에서 주인공 조가 한 대사가 떠올랐다.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니까, 당시에는 뭐 같았어도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과거는 늘 아련하고 그리운 시절이다. 나도,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우리 모두 과거에 미련을 둔 채 앞으로 나아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희와 영의 관계는 어떤 이름으로 불려야 할까? 사실 꼭 어떤 '이름'으로 불릴 필요는 없는데, 세상은 구분하고 분류해서 명명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항간에는 동거했다느니, 낙태했다느니 하는 사실이지만 사실이 아닌 소문이 사실처럼 퍼져 나간다.

 

남녀 사이에서 '결혼을 거치는 공인된 관계가 아니라면 미완의 관계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재희와 영의 관계는 '낭만적 사랑과 결혼의 클리셰에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또다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는다. 두 사람이 이성이라는 이유로 성애적 사랑으로 묶일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다.

 

 

우럭 한점 우주의 맛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가.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 그 불편한 진실을 나는 중환자실과 병실을 오가며 깨달았다.(169)

 

수록된 단편 중에서 가장 몰입감 있고 마음 아픈 작품이다. 잘못된 방식으로 자신을 사랑해왔던 엄마가 병에 걸리자, 주인공 역시 잘못된 방식의 사랑으로 도망친다. 대학 시절 운동권이었다던 그와의 사랑은 본능적이지만, 강렬한 만큼 영을 괴롭힌다.

 

고등학생 때 선배 형과 키스했다는 이유로 영을 정신 병원에 보냈던 엄마는 영이 그를 가장 필요로 할 때 영을 버렸다.  다시 한번 엄마에게 진실을 밝히려 했지만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린 그 순간, 운동권 그 역시 영이 그를 가장 필요로 할 때 떠났다. 영은 두 사람이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영 스스로도 자신이 용서를 원하는지 복수를 원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영은 엄마의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엄마가 죽는 꿈을 꾼다. '기독교 신자인 엄마와 골수 운동권이었던 그에게 끝내 교정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받아들여지는 사실에 오래 절망해왔던 영은 '꿈속에서나 간신히' 엄마를 이해하고 용서한다. 그리고 그건 운동권 그에 대한 이해와 용서이기도 하다.

 

 

대도시의 사랑법, 늦은 우기의 바캉스

 

마지막 두 작품은 규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운동권 그와의 사랑이 날 것 그대로의 사랑이라면 규호와의 사랑은 안정적이고 일상적인 사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규호와의 사랑은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보여준다.

 

특히 HIV라는 정확한 이름 한 번 등장하지 않는, '강력하게 타자화된 은유로서의 질병'인 '카일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영의 일상을 무너뜨린다. 말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한번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낙인이 찍힌다는 점에서 카일리는 동성애를 떠오르게 한다. 카일리가 없는 규호는 '제주(섬)에서 인천을 거쳐 서울로 그리고 상해'로 점차 나아가지만, 카일리와 평생 함께해야 하는 영은 자신의 방에 고정되어 있다. 카일리 때문에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는 영의 반쪽짜리 여권은 '지금 한국에서 퀴어 정치가 지닌 한계를 반영'한다.

 

지극히도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동시대 언어로 말하는 사랑 이야기다. 마치 누군가의 속사정으로 가득한 일기를 몰래 읽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느슨하고 풀어진, 경박해 보이기까지 한 문장이 주는 생생한 느낌이 더 날카롭게 마음을 파고들고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왼쪽은 기존 표지이고, 오른쪽은 동네서점 에디션 표지이다.

 

개인적으로 동네서점 에디션 표지가 소설 전체 분위기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기존 표지가 '대도시'에 초점을 맞췄다면, 동네서점 표지는 '사랑법'에 초점을 맞췄달까. 동성애자라는 입장과 바람 난 아버지, 어딘가 이상한 엄마 때문에 아마 더 절실했을 사랑을 찾아 헤매는 주인공 영을 잘 보여주는 표지다.

 

*작은 따옴표로 표시한 부분은 강지희 평론가의 해설을 인용한 부분입니다.*